개인용 컴퓨터의 혁신을 이끈 두 주인공

2018. 3. 3. 14:30IT 역사를 파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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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용 컴퓨터의 혁신이라 불리는 Apple II는 히피 스타일의 두 청년, 스티브 잡스의 스티브 워즈니악에 의해 낡은 차고에서 탄생했습니다. 개인용 컴퓨터의 혁신을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빌 게이츠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빌 게이츠는 평생에 걸친 라이벌로 개인용 컴퓨터의 혁신을 일으키고 전 세계 사람들을 매료시켰습니다. 개인용 컴퓨터의 혁신의 중심에 있는 이 두 인물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알아봅니다.

스티브 잡스 태어나다

스티브 잡스는 태어난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한 기계공 부부에게 입양되었습니다. 스티브가 다섯살이 되던 해, 가족은 마운틴 뷰로 이사를 가게 됩니다. 마운틴 뷰는 바로 실리콘밸리의 중심지로 급부상한 도시였습니다.

당시 실리콘밸리의 상황을 한번 살펴봅시다. 캘리포니아 북부 샌프란시스코 만 남부에 위치한 실리콘밸리는 초창기에는 스탠포드 대학 주변의 전자부품을 군에 납품하던 회사들을 중심으로 성장했습니다. 1940 ~ 1950년대 스탠퍼드대학에서는 교수들과 학생들의 창업을 장려했고, 이런 분위기 속에 성장한 대표적인 회사가 HP(휴렛팩커드)였습니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반도체와 전기, 전자에 관련한 하이테크 회사들이 나타나면서 실리콘밸리는 오늘날 세계를 대표하는 기술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953년 벨연구소를 떠난 윌리엄 쇼클리는 1956년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하고 여러가지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곳에서는 별다른 성과를 이룩하지 못했지만 이 회사의 엔지니어 8명이 독립해 창업한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 독립해 만든 회사가 지금 반도체 업계에서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인텔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는 환경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학창시절 문제아였습니다. 학교도 다니기 긿어해서 결석을 많이 했는데, 초등학교 4학년 시절 담임선생님이 자신을 돈과 사탕으로 달래지 않았다면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스스로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를 자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HP에 다니던 동네 아저씨가 건네준 히스키트라는 아마추어용 전자공학 키트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스티브 잡스는 멋지고 창의적인 하드웨어를 설계하는 꿈을 품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Apple 탄생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 또 다른 스티브를 만나다

실리콘 밸리라는 환경은 그에게 많은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열 살 때 컴퓨터를 처음 보았습니다. NASA가 실리콘 밸리에 설립한 연구센터에 놓여 있던 터미널이었습니다. 터미널은 독자적으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컴퓨터는 아니지만, 유선으로 메인 프레임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컴퓨터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그것을 보자마자 운명적인 만남임을 느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어린 학생이었지만 이미 히스키트를 통해 전자부품의 조립과 기계의 작동 원리를 깨우쳤습니다. 특히 전자제품 조립에 취미가 많았던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배짱이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HP 창업자인 휴렛에게 전화를 걸어서 수십 분간 설득한 끝에 원하는 부품을 얻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그의 인생을 바꾼 위대한 엔지니어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또 다른 스티브, 스티브 워즈니악입니다. HP는 방과 후 강의에서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던 스티브 잡스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스티브 잡스에게 여름방학 동안 일하는 인턴을 제의했고, 잡스 역시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1950년 생으로 스티브 잡스보다 다섯 살이 많습니다. 정말 희대의 GEEK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워즈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그의 아버지는 세계적인 방위 산업체로 이름이 높은 록히드 마틴 사에서 일하는 미사일 개발자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장난감과 희한한 기계들을 만들어냈습니다. 워즈니악은 버클리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다가 평생 엔지니어로서 기계를 만들고 싶다는 일념에 휴학하고 HP에 취직했습니다. 기계를 좋아하는 괴짜들이 만났으니 둘이 친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스티브 잡스, 디자인과 만나다

스티브 잡스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연설할 때, 서체 대지안 강의를 듣고 느꼈던 모든 것을 10년 뒤 매킨토시에 구현하면서 전자출판 혁명을 이끌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습니다.
1972년 스티브 잡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틀랜드 오리건에 위치한 리드대학 물리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잡스는 단 한 학기만 다니고 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잡스는 양부모님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친구들에게 이리저리 빌붙어 살면서 2년간 자신이 원하는 수업들을 들으러 다녔습니다. 그 중에 가장 그에게 큰 영향을 준 강의가 서체 디자인 강의였던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처럼 엔지니어면서도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커다란 열정을 가진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잡스는 디자인 서체 강의를 몰래 들으면서 서체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었으며, 그 서체 속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그의 작품에 녹아들도록 만들었습니다.

두 스티브의 환상적인 호흡

1974년, 스티브 잡스는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와서 당시 실리콘밸리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아타리의 문을 두들겼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스티브 잡스는 아타리의 직원이 되었습니다. 수염 투성이에 장발을 한 히피 스타일의 잡스는 매번 경비원에게 쫓겨났지만 당시 아타리에서 게임 디자이너로 일하던 앨런 알콘이 잡스가 생각보다 기술적으로 해박하고 아케이드 HP에서 일한적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아케이드 게임기를 고칠 요량으로 그를 채용하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는 다른 직원들의 일에 간섭하며 이상한 말만 하고 다녔기에 정상적인 회사 생활이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앨런은 그를 저녁 시간에만 나와서 일을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잡스가 하는 일은 주로 엔지니어들이 만들어 놓은 디자인을 약간씩 변형하는 것이었는데, 회로를 일부 추가하거나 다른 음향을 집어넣는 일을 했습니다.

야간에 아타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은 스티브 잡스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괴짜 워즈니악도 함께 했습니다. 그는 HP 엔지니어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아타리의 광팬으로, 퐁 게임을 자기 마음대로 디자인해서 만든 독특한 퐁게임을 가지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밤마다 워즈니악을 아타리 본사로 불러들인 스티브 잡스는 그의 실력을 동료들에게도 자랑했습니다. 그의 실력을 알아본 앨런으 워즈니악을 아타리로 데려오려고 했지만 HP에서 전자계산기를 만드는 일에 만족하고 있던 워즈니악은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그렇지만 워즈니악은 스티브 잡스를 따라 밤마다 아타리를 찾아 여러가지 일을 같이 했습니다. 상당히 어려운 문제들을 쉽게 해결했기 때문에 비디오 게임 산업의 아버지이자 아타리의 창업주인 놀란 부쉬넬은 그들에게 주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6개월 정도 아타리에서 일을 하던 스티브 잡스는 회사 수뇌부에게 인도로 여행을 보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사실 스티브 잡스는 대학교때부터 인도에 심취해 영혼 여행을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인턴 직원의 황당한 요구에 앨런 알콘과 놀란 부쉬넬은 당황했지만, 때마침 독일에서 터진 게임기 문제를 현지에 가서 해결한다면 인도 여행을 허락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바로 짐을 싸고 독일로 날아가서 단 2시간 만에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문제를 해결한 뒤 스티브 잡스는 곧장 리드 대학을 다닐 때부터 친구였고 앞으로 애플에서 일하게 되는 댄 콧키와 함께 6개월간 인도 여행을 떠납니다.

이후 아타리는 회사의 여러 프로젝트들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아타리는 벽돌깨기 게임 디자인과 프로토타입에 대한 사내 아이디어를 수집하면서 보드에서 TTL 칩(아케이드 게임기 안에 들어가는 칩)을 줄이는 아이디어나 기술에 돈을 거는 콘테스트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게임 하나에 보통 130 ~ 170개 정도 칩이 들어갔는데, 아타리는 70 ~ 100개 정도로 목표를 잡았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감하게 콘테스트에 지원했습니다. 스티브 잡스에게는 워즈니악이라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그는 워즈니악에게 거짓말로 4일의 시간밖에 없다고 속인 뒤 아타리의 칩을 50개 이하로 설계하면 700달러, 40개 이하로 설계하면 1000달러를 주기로 했다고 말한 뒤, 협상을 통해 칩의 수를 몇 개로 줄이든 워즈니악이 350달러를 받기로 협의했습니다. 결국 워즈니악은 4일 밤을 새면서 손으로 게임보드의 프로토타입을 거의 완성했습니다. 그는 칩의 수를 46개까지 줄이는 데 성공했고, 이들의 성과에 감명받은 아타리의 경영진은 스티브 잡스에게 원래 지급하기로 했던 금액보다 훨씬 많은 5000달러를 주었습니다. 워즈니악의 디자인을 수정해서 1976년에야 세상에 선보인 게임이 바로 게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히트작 중 하나로 남게 된 벽돌깨기였습니다.
워즈니악의 디자인을 수정해서 1976년에야 세상에 선보인 게임이 바로 게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히트작 중 하나로 남게 된 벽돌깨기입니다.


빌 게이츠 태어나다

빌 게이츠는 1955년 시애틀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빌 게이츠의 아버지는 변호사였고 어머니는 유력한 은행의 이사진이었습니다. 빌 게이츠는 태어날 때부터 법과 경제라는 현대 사회에서 필수적인 시스템에 익숙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빌 게이츠의 어린 시절은 의외로 평범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실리콘밸리에서 신기한 물건들과 기계들을 접하면서 자란 것에 비해, 빌 게이츠는 열 세살이 되어 컴퓨터와 처음 만나게 됩니다. 빌 게이츠는 하드웨어보다는 소프트웨어에 관심을 가졌고, 이것이 Microsoft의 모토가 되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다

빌 게이츠는 스티브 잡스와는 달리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빌 게이츠는 머리가 굉장히 뛰어났습니다. 암기력이 너무 좋아 백과사전이나 성경책을 통째로 외우고 암송할 정도였습니다. 빌 게이츠는 열한 살이 되던 해에 레이크사이드 스쿨에 입학했습니다. 중고등학교가 합쳐진, 시애틀의 유명한 사립학교인데 동부의 명문대학 등록금보다 더 비싼 학비를 내야하는 학교였습니다. 학교가 그만큼 시설이 좋지만 교육 방식이 굉장히 엄격해서 빌과는 잘 맞지 않았습니다.

1968년, 빌 게이츠의 인생은 한 사람과의 만남으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레이크사이드 스쿨은 부모회에서 주최한 바자회와 수익금으로 컴퓨터를 들여놓게 되는데, 제너럴 일렉트릭사의 ASR-33이라는 컴퓨터였습니다. 당시 컴퓨터가 매우 드물었고, 시애틀에서 컴퓨터를 쓸 수 있는 환경을 최초로 구축한 곳이 레이크사이드였습니다. 이떄만 하더라도 메인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커다란 컴퓨터가 외부에 있고, 이 컴퓨터와 연결한 터미널을 들여 놓고 사용해야 했습니다. 메인 프레임과 터미널은 전화선으로 연결되었는데 사용량에 따라 추가 요금을 내야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시간당 40달러나 되는 요금을 감당할 만한 학교의 경제력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빌 게이츠는 존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빌 게이츠는 폴 앨런이라는 친구와 함께 이 단말기 앞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이들은 후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하고, 평생을 친구로 지내게 됩니다. 선생님보다도 더 뛰어난 실력을 닦은 그들에게 약간의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과도한 컴퓨터 사용량 때문에 학교에서 컴퓨터 사용을 금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뛰어난 프로그래밍 실력을 활용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는 폴 앨런과 몇 명의 친구들을 더 모아서 레이크사이드 프로그래밍 그룹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메인 프레임 컴퓨터를 임대 및 판매하는 인근 회사를 찾아가서 프로그래밍을 하고 버그를 찾는 일을 하는 대신 컴퓨터를 마음껏 쓰게 해달라고 했고, 야간에는 써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다 회사가 망하자, 이번에는 폴 앨런의 아버지가 주선해서 시애틀에 있는 명문대학인 워싱턴 주립대학교 컴퓨터를 쓸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워낙 뛰어난 실력을 가졌기 때문에, 고등학생들이지만 일거리를 주는 곳들이 점차 생겨났습니다. 특히, 인포메이션 서비스라는 회사가 만든 급여관리 프로그램의 경우 빌 게이츠가 프로젝트를 관리하면서 3개월간 1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의 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이 성공을 발판으로 사업에 눈을 뜬 빌 게이츠는 정식으로 창업을 하게 됩니다. 이때 아버지가 직접 창업을 도와주었는데, 이렇게 창업한 회사가 트래프 오 데이터였습니다. 이 회사는 당시로서는 최신 마이크로 칩이었던 인텔의 8080 CPU를 이용해서 교통상황을 점검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고, 빌 게이츠는 이를 바탕으로 1973년 초에는 미국 하원의회를 위해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외부에서 외주를 받은 일로도 돈을 벌고, 학교에서도 다양한 관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등 종횡무진으로 활약한 빌 게이츠는 1973년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둘러싸여 지내던 고등학교 생활을 끝마치게 되었습니다.

하버드 대학에 입학한 빌 게이츠는 현재 마이크로소프트 CEO를 맡고있는 스티브 발머를 만났습니다. 하버드 대학에서도 학업보다 컴퓨터에 심취했던 빌 게이츠는 폴 앨런과 계속 연락을 취했고, 1974년 여름에는 하니웰에서 같이 일을 하기도 했습니다.

1975년 세계 최초의 컴퓨터 알테어 8800이 잡지에 소개됐을 때 폴 앨런은 개인용 컴퓨터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잡지를 들고 빌 게이츠에게 달려갔고 그들은 대학 캠퍼스를 나와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알테어 8800이 판매되고 있을 때, 에드 로버츠(알테어8800을 생산하던 MTS 창업자)는 시애틀에 있는 한 회사에서 베이식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를 구매할 의사가 있는지 묻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당시 베이식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에드 로버츠는 회사에 전화도 해보고 주소로도 찾아가 보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 그 편지는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보낸 것으로 아직 베이식을 개발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여러 차례 사업을 통해 어른들이 얼니 학생들의 말보다는 기업체가 공식적으로 보내는 편지를 더 신뢰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머리를 썼던 것입니다. 이런 해프닝을 거쳐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에드 로버츠와 접촉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당돌해 보이긴 했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에드 로버츠는 한번 만들어 보라는 얘기를 합니다.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은 함꼐 미니 컴퓨터에 있는 8080 시뮬레이터를 이용해 베이식 인터프리터(프로그램 언어를 한 줄씩 읽어 들여 실행하는 일종의 프로그램 번역기)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뉴 멕시코 주의 앨버커키까지 날아간 폴 앨런은 알테어 8800에서 자신들이 만든 프로그램을 실행시켰지만, 화면에 'Altair Basic'이라는 푯만 남기고 작동을 멈추어버립니다. 첫 번째 작업이 실패했지만 일단 빌 게이츠와 폴 앨런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 정도의 신뢰를 에드 로버츠에게 주는 것에 성공했고, 지속적인 작업을 통해 프로그램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 베이식을 시초로 포트란 컴파일러와 디스크 운영체제인 MITS-DOS를 개발한 마이크로소프트는 결국 MITS의 품을 떠나 독자적인 길을 걸어나가게 됩니다.
컴퓨터 마니아였지만 만드는 것 보다는 판매하는 것에 먼저 눈을 뜬 빌 게이츠는 이렇게 판매처를 확보하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방식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앞날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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