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개인용 컴퓨터 혁명

IT 역사를 파헤치다|2018. 3. 7. 00:17

두명의 스티브, 혁신을 내놓다


아타리에서 같이 일하며 호흡을 맞춘 스티브 잡스와 워즈니악은 홈브류 컴퓨터 클럽이라는 컴퓨터 마니아들의 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이 클럽은 다양한 전자 부품이나 회로 그리고 그에 대한 정보를 나누고, 컴퓨터 관련 장비를 직접 조립하는 마니아적인 활동을 하는 모임이었습니다. 1975년에 고든 프렌치의 차고에서 처음으로 집결한 후 비정기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갔습니다.

비록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지만 실력과 컴퓨터를 다루는 수준은 당대 최고였습니다. 알테어 8800 컴퓨터가 나온 뒤에는 이와 유사한 컴퓨터를 조립하거나 프로그래밍에 대해서 토론했으며, 이 모임에서 비정기적으로 발행하는 소식지는 지금의 실리콘밸리 문화를 만드는데 일조하였습니다. 이 모임에서 개인용 컴퓨터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는 APLLE I이 나올 수 있는 기반이 다져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스티브 잡스는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워즈니악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 컴퓨터를 설계하고, 차고에서 컴퓨터를 조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1976년, 로널드 웨인과 함께 애플 컴퓨터의 첫 스타트를 끊게 되었습니다. 워즈니악은 잡스의 차고에서 만든 APPLE I 개인용 컴퓨터 키트를 홈브류 컴퓨터 클럽에 처음으로 소개했습니다. APPLE I은 안테어 8800과 비슷한 형태였는데, 내부에 확장카드를 꽂을 수 있도록 했고, 25달러 정도였던 6502 CPU를 장착했으며, 256바이트 ROM과 4KB ~ 8KB의 RAM을 설치했습니다. 6502는 6800 CPU보다 성능이 떨어졌지만 기능적으로 상당히 비슷했기 때문에 4KB RAM에 동작하는 베이식 인터프리터를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들어서 탑재시킨 뒤에 판매를 할 수 있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여러 컴퓨터 가게들을 돌아다니면서, 컴퓨터를 보여주고 주문을 받았습니다. APPLE I을 가장 먼저 주문한 사람은 후에 컴퓨터 체인으로까지 발전한 바이트샵을 준비하던 폴 테렐이었습니다. 500달러에 50대를 구매하기로 하고 잡스에게 주문했지만, 현재 APPLE에게는 50대를 만들 돈이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잡스는 자신의 폭스바겐을 팔았고 워즈니악은 자신이 아끼던 HP의 최고급 공학 계산기까지 팔았습니다. 잡스는 특유의 영업력과 화술로 부품을 공급하는 가게들로부터 신용을 담보로 상당 부분을 메웠고, 추가로 은행에서 5,000달러의 빚을 얻어 부품을 구했습니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뛰어난 기술자였지만 협상을 하거나 계약을 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고 그저 컴퓨터만 좋아하는 괴짜였습니다. 그에 비해 스티브 잡스는 사람의 가능성을 볼 줄 알았고, 잘 모르는 사람도 설득할 수 있는 화술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둘의 조합은 매우 훌륭했고 그 결과 APPLE I은 200대 정도를 제작했는데, 약 10개월 동안 대부분 판매가 되었습니다. APPLE I은 알테어와 비교하면 그래도 사용하기 편리한 편이었지만 조립이 간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또한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베이식을 이용하려면, ROM에 3KB 정도 되는 16진수 코드를 입력해야 했는데, 적어도 20분에서 30분은 소요되는 작업이었습니다. 잡스는 APPLE I은 그저 마니아들의 장난감일 뿐이지 자신이 생각하던,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잡스와 워즈니악은 APPLE I을 추가로 생산하기보다는 사용자가 사용하기 더 편리한 형태의 컴퓨터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저장하기와 불러오기가 가능하도록 카세트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고, 마더보드에 추가했습니다. 여기에 워즈니악이 만든 베이식 언어를 담아서 팔기 시작했는데, 조언을 얻어 나무로 만든 박스에 마더보드를 넣어서 APPLE I을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업그레이드 했습니다.

이렇게 고심 끝에 만들어진 APPLE II는 처음부터 멋진 플라스틱 케이스와 키보드를 통합한 형태로 디자인 되었습니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아타리에서 작업했던 벽돌깨기를 실행할 수 있는 하드웨어를 만들기 위해서 컬러를 지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를 위해 라인을 그리고 컬러를 바꾸는 명령이 들어간 새로운 베이식 언어와 루틴을 추가하고 소리를 내기 위한 사운드 작업을 하고 본체에 스피커까지 달았습니다. 이처름 APPLE II는 게임을 좋아했고 벽돌깨기를 사랑했던 스티브 워즈니악에 의해 좀 더 범용적이고 친숙한 컴퓨터로 재탄생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기능을 추가했기 때문에 APPLE II용으로 수많은 컴퓨터 게임들이 등장했고, APPLE II가 PC 시장의 최강자로 군림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워즈니악은 이에 그치지 않고 APPLE II에 8개의 확장 슬롯을 설계해서 마더보드와 통합했습니다. 이는 다른 경쟁 제품들에 비해 강력한 장점이었습니다. 수 많은 주변기기 제작사들이 다양한 확장카드들을 만들면서 APPLE의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사실 이떄에도 잡스는 프린터와 모뎀을 위한 확장 슬록 2개만 있으면 되었고, 나머지는 불필요하다면서 제작비만 올라간다고 반대했지만, 워즈니악은 HP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확장성이 중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해 8개의 슬롯을 모두 포함시켜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용자들이 이 확장성을 APPLE II의 큰 장점으로 뽑으며 열광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개방형 철학에 대해 처음부터 긍정적이지는 않았습니다. APPLE II가 확장 슬롯을 8개나 가진 개방형 컴퓨터로 만들어진 것은 워즈니악의 영향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잡스는 워즈니악과는 달리 APPLE II가 정말 다른 컴퓨터와는 차별화된 모습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스케치와 모형을 만들어가면서 기존의 각진 육면체 형태의 모습을 탈피한 새로운 형태의 컴퓨터를 만들고자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는 그저 기계에 불과했고 예쁘다는 것과는 엄청나게 거리가 멀었습니다.

잡스는 비대칭이면서도 날카로워 보이고, 기능성도 겸비한 케이스를 원했고, 나사가 겉에서 보이지 않는 케이스를 디자인했습니다. 나사는 모두 바닥에 위치시켰고, 누구나 쉽게 보드에 접근할 수 있도록 케이스 뚜껑을 열기 쉽게 했으며, 확장 슬롯에 카드를 꼽는 작업이 간편한 디자인을 멋지게 해냈습니다. 또한, 키보드의 컬러와 파워, 냉각팬 등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아타리에서 같이 일했던 아날로그 회로 전문가 로드 홀트를 영입하여 경랑의 파워와 냉각팬을 디자인했습니다. 가벼언 파워와 TV 연결을 가능하게 만든 디자인은 APPLE II의 경쟁력을 한층 더 높여주었습니다. 당시 APPLE II의 디자인은 정말 혁신적이었고 사람들을 끌어당기기에 충분했습니다. APPLE II는 1977년 4월 대중들에게 공개되었고 새로운 APPLE 로고와 함께 전 세계를 APPLE 열풍에 빠져들게 만들었습니다.

APPLE의 대항마, 마이크로소프트의 발전

세계 최초의 PC인 안테어 8800에 공급할 베이식 언어 인터프리터를 개발하겠다며 MITS를 졸랐던 빌 게이트와 폴 앨런은 가능성을 인정받고 약속한 8주 만에 베이식을 완성하고 앨버커키로 날아갔습니다. 이들이 개발한 베이식은 완벽하게 작동했고, 이를 기반으로 앨버커키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설립하게 됩니다.

빌 게이츠는 아버지의 도움도 받고, 과거 레이크사이드 고등학교 시절에 함께했던 동료들을 속속 회사에 합류시키며 회사를 키워나갔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베이식은 이용하기도 쉽고, 다양한 응용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데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기 때문에 컴퓨터 마니아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전문 소프트웨어 회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실력을 신뢰한 여러 하드웨어 회사들이 많은 일을 의로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업하자마자 매출을 10만 달러 이상 기록했고 다음 해에도 성장가도를 달렸지만, 이제는 MITS가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소프트웨어를 직접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하드웨어에 포함되어 나가면서 로열티를 받는 구조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MITS의 하드웨어 생산 능력과 판매량에 따라 회사의 성장이 제한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였습니다. 빌 게이츠는 이런 형태로는 회사를 키울 수 없다고 느꼈습니다. 더구나 독점적 계약을 미끼로 다른 회사 하드웨어는 베이식을 탑재하지 못하도록 한 MITS의 정책에 불만이 가득했던 빌 게이츠는 1년 뒤인 1977년 결국 MITS와 맺은 계약을 파기하고 맙니다.

계약 파기에 분노한 MITS는 빌 게이츠와 마이크로소프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MITS 측이 자사 소프트웨어를 판매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대립했습니다. 법원은 결국 빌 게이츠의 손을 들어주었고, 마이크로소프트는 자신들이 개발한 베이식을 다른 ㅗ히사에도 판매할 권리를 취득하면서 때마침 불어 닥친 PC 혁명의 시대의 시류에 올라타게 되었습니다.

1978년 11월에는 일본의 하드웨어 업체들에게 베이직을 공급하기 위해 아시크 마이크로소프트라는 법인을 일본에 설립하게 됩니다. 이 회사는 후에 마이크로소프트의 일본지사로 변모해 일본을 중심으로 결성한 MSX 컴퓨터 연합을 이끄는 중심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전 세계 PC 하드웨어 업체를 고객으로 맞은 빌 게이츠는 자신의 고향인 워싱턴주 시애틀 인근의 벨뷰로 회사를 옮기는데, 이때가 1979년 1월 1일이었습니다. 바야흐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시애틀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 애플과 손을 잡다


1977년 애플 II가 출시될 당시, PC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본 소프트웨어는 베이식 언어를 해석해서 실행해주는 인터프리터였습니다. 애플 II에는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든 정수 베이식이라는 인터프리터가 탑재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실수 처리와 일부 문자열을 처리하는 데 문제가 있어 비즈니스용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기 까다로웠습니다.

1977년부터 1979년 6월까지 정수 베이식은 애플 II에서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베이식 인터프리터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앞에서 언급한 문제들 때문에 애플은 새로운 베이식 인터프리터를 원했는데, 그 파트너로 마이크로소프트를 선택하게 됩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1975년 이후 베이식 인터프리터 개발과 관련해서는 최고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1976년 중반 마이크로소프트의 첫번째 직원인 마크 맥도널드는 6502 마이크로프로세서에 관심을 가졌고, 당시에 6502를 이용한 PC는 애플 I 밖에 없었습니다. 애플 II가 출시되기 전에 마이크로소프트는 스티브 잡스에게 전화해서 새로운 베이식에 관심이 없는지 의사를 물은 적도 있다고 합니다.

애플 II의 정수 베이식의 성능에 대한 불만이 점차 나타나자 잡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정수 베이식을 만든 워즈니악은 DISK II라는 새로운 인터페이스 카드를 디자인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예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안했던 내용을 기억해냈고 다시 연락을 하게 됩니다. 결국 1977년 8월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는 10년간 마이크로소프트가 개발한 6502 베이식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수정하는 권한을 애플이 가지는 것을 내용으로 계약을 맺게 됩니다. 당시 마이크로소프트는 코모도 PET에 탑재할 ROM 베이식을 개발하는 데 역량을 기울였지만, 하드웨어 제작과 판매가 지연되면서 일시적으로 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시기였습니다. 때문에 선호하던 하드웨어 판매당 로열티 지급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일반 개발 계약에 동의한 것입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새로 만들 베이식이 기존에 만들어둔 베이식을 약간만 손보면 되는 수준으로 쉽게 만들 수 있었고, 이후 수정이나 개발은 자사의 엔지니어를 통해 애플에서 책임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부담이 없었다는 이점도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협상의 달인이라 불리는 빌 게이츠답지 않게 그의 커리어에서 어쩌면 최악의 조건으로 거래를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베이식의 이름을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의 이름을 따서 애플 소프트 베이식으로 결정하고, 1977년 11월 카세트 테이프에 담아서 출시하게 됩니다. 이처럼 처음으로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벌였던 줄다리기와 협상에서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일반적인 로열티 계약 대신 자사 엔지니어를 투입하고 마이크로소프트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10년간 마음대로 고쳐 쓸 수 있는 계약을 이끌어낸 잡스도 대단하지만, 천하의 마이크로소프트와 빌 게이츠도 초창기 돈이 궁한 때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인간적인 면도 보인 사건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우여곡적 끝에 탄생한 초창기 애플소프트 베이식에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테이프로 로드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컴퓨터를 껐다 켠 후에는 베이식을 다시 로드하고 프로그램을 돌려야 했습니다. 또한 애플 II의 고해상도 그래픽을 위한 메모리 영역에 침범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래픽 언어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처리할 수 있는 베이식은 애플소프트 베이식밖에 없었기 때문에 비즈니스용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개발자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에 업그레이드를 감행합니다. 버그도 고치고, 애플 II의 고해상도 그래픽을 쉽게 쓸 수 있는 애플소프트 베이식 II를 출시했습니다. 이 베이식을 카세트테이프와 RAM, 펌웨어 카드 ROM, 언어카드 ROM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출시했습니다. 언어 자체에 대한 반응도 좋았고 ROM으로 출시한 것에 대한 평한이 좋아지면서 소비자들은 차츰 애플소프트 베이식을 본체에 내장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애플 II+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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